[남시언의 맛있는 책 읽기](159)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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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그리스인 조르바



우리들은 항상 자신만의 생각과 견해로 세상을 판단하고 또 그렇게 이해하고 살아간다. 매번 옳고 그름을 따져묻고 정답을 찾으려 애쓰며 어떤 상황에서 '모르는게 죄다'는 식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우고자한다. 확실히 과거보다 현재에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배우는데, 그리고 이해하고 습득하는데 편리하다. 하지만 그에 걸맞게 배워야할 것들은 늘어났으며, 오히려 무언가를 배우는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모르게 되어버렸다.



자신만의 생각과 직감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가름할 수 없는 경험자들의 조언을 듣고 그것을 참고하려고한다. 스스로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변명거리를 삼으려는 목적인 것처럼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을 내리고 싶어한다. 친구 때문에 내가 실패한다면, 그 친구를 욕하면서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일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은 여전하며 바뀌는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런 이야기들이 없다면 그 무엇도 판단할 수 없는 문화적 패닉에 빠진채 살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이제 더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 직감이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다. 오로지 자료,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한 백데이터(Back Data)만이 무언가를 결정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쇼핑몰 상품에 체험리뷰가 없다면 구매할 수 없고, 여행에 대한 블로그 검색결과가 없다면 떠날 수 없다.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들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더 바라는 사회를 살고있고, 또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그 틀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자유는 없다. 스스로 자유롭게 살고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일이라곤 몇가지 되지 않는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 되는 조르바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인이라 할 수 있다. "자유인이 조르바인가? 아니면 조르바가 자유인인가?"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조르바는 정말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유인이었으며, 현대판 자유인의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더 소름끼치는것은 그 조르바가 실존인물이었으며, 이 세상 어딘가에는 또 다른 조르바가 자유를 찾아 떠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 때문이다.

"악마나 물어가라지!"
당시 크레타 섬과 당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가장 히트한 유행어가 아닐까 싶다. 신과 악마가 대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사람들은 유독 종교적인 어떤 믿음과 신화가 팽배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종교를 숭배하는 상황에서 조르바는 종교를 믿지 않는 이단아였지만, 누구보다 '신'과 가깝게 있었고, 지식은 없었지만 '경험'이 있었으며, '겁'이 없었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작가이자 책 속에서 화자가 되는 작가 카잔차키스는 자유를 열망하는 한 남자로 묘사된다. 조르바가 자유인이라면 작가 그 자신은 비자유인이었으며, 어딘지 모르게 몸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자유에 대한 열망과 욕구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조르바에게 가르침을 받아야할 어떤 진리로 나타난다. 하지만 독자인 내가 보기에 조르바와 카잔차키스 모두 자유인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술과 음식을 즐기고, 하루종일 글을 쓰고 광산을 캐는 척하며 장기간 펜대를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오늘날 몇이나 된단 말인가! 조르바가 순도 100% 자유인이라면 작가는 조르바보다는 조금 덜 자유인이었을 뿐. 카잔차키스와 조르바 모두 자유인이었고 그리스인 이었다.

책과 지식 속에 갇혀 신체를 거부하는 대신 정신을 숭고히하는 작가에게 조르바는 전혀 반대편의 인물로 설정되어 나타난다. 조르바는 책보다는 경험을, 지식보다는 느낌, 정신보다는 신체를 중요시하는 인간이다. 단어보다 춤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에 더 익숙한 조르바는 세상을 자신만의 눈으로 해석하는데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있다. 가진 것이 없었지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상품을 가지고 있었고, 아는 것이 없었지만 진리보다 더 진리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며, 자유로운 사상에서 펼쳐져나오는 상상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이 책을 읽는내내 마음 한 쪽 구석이 쓰라린 것은 오늘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인 '자유'를 빼놓고서 "행복, 행복, 행복"거리며 살고있는 까닭이다. 가장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욕구인 자유를 빼앗기고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이며, 그것에 의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인생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힘들게 노력하고 있는 삶이 안타까워서 이기도했다.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이라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에게 없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인간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즉, 인간인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른채 평생을 허비한다. 하지만 조르바는 그렇지않다. 조르바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어울릴 것 같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아니던가! 생각에 지배받지 않는 인생 말이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위대한 고전문학 작품으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호불호가 강한 작품이기도 하다. 책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욕설 대화문과 여성 폄하 분위기,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행동과 종교적인 치부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게 그 당시의 문화였으며, 우리내 조상들이 살았던 어느 시점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불편한 작품인지도 모른다. 분량이 많고 자칫 거북할 수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작가의 문학적 표현력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연과 상황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책보다도 장면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만큼은 카잔차키스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거지!"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가장 인간다운 것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르바로부터, 니코스 카잔차키스로부터 전해져 온 자유와 생각은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만약 이 책을 휴가지나 주말 시간을 이용해 읽는다면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휴가 마지막 날이나 개학 전 날, 일요일 저녁에 읽는 것은 말리고싶다. 동물적인 자유는 당신을 흥분시킬테니까 말이다!

생전에 카잔차키스가 마련해 놓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 책을 읽는자에게 자유가 있을진저!


그리스인 조르바 - 10점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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