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번째 글, 불나방
- 일기
- 2018. 1. 11.
3500번째 글, 불나방
밥먹고 글만 쓰는 사람이라고하더라도 글이 자동으로 써지는건 아니다. 책을 읽게되면 그 책에 매몰될 뿐 글이 써지는건 아니다. 유명한 영화를 감상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술에 잔뜩 취한다고 하더라도 글이 써지는건 아니다. 좋은 논문과 보고서와 기사를 읽고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에 빠져 우주와 같은 상상력에서 헤엄친다고 하더라도 글이 써지는건 아니다. 글을 직접 쓰는 상황이 아닌 모든 상황에선 글이 써지지 않는다. 글이란건 이토록 지리멸렬하고 고통스러운, 그러면서도 사랑스러운 자식과도 같은 것이다.
최근에 마케팅 경제경영 책을 읽다가 우연치않게 글쓰기에 접목할 수 있는걸 하나 발견했다. 수사학적 기법을 설명한 내용에서 결구 반복, 수구 반복, 그리고 도치 반복에 대해 정리돼 있었다. 아아… 나는 잠깐동안, 아니 한동안, 그것도 아니라면 대충 몇 달동안 너무나도 가볍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참을 수 없을만큼 자극적이고 직관적이면서도 엉망진창에 형편없는 글들을 접하고 읽고 썼던 것 같다.
내가 쓰고 싶은 글 VS 남들이 읽고 싶은 글 사이의 스펙트럼은 넓다. 내 글은 이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결국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죽도 밥도 아니고 그렇다고 못먹을 것도 아니면서 맛있는 것도 아닌, 색으로 치자면, 검은색과 흰색이 어지럽게 뒤섞인 회색에 가까운 글이 아닐까. 이제 대부분의 글은 디지털화 됐고 실물로는 존재하지 않는, 말하자면 0과 1로 구성되어 알 수 없는 오류에 취약한 그 무엇이 됐다.
나는 글을 짧게 쓰는 재주가 없는데다가 긴 글을 좋아하는 까닭에 긴 글을 쓰고싶지만 사람들은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쓰고 싶은걸 쓸텐가? 보여주는 글을 쓸텐가? 어쨌거나 누군가에게는 보여줘야하는 글이라면, 여기엔 굉장한 고뇌가 있기 마련이다.
국어사전을 씹어먹으면서 어휘 공부를 해도 글은 써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단어라고하는 것은 글 안에서 살아 숨쉬는 것이지 글이 없다면 단어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쓰고싶은 글과 남들이 선호하는 글 사이에서 나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었다. 그저 흐지부지한 글 몇 편을 똥처럼 싸질렀을 뿐이다.
“단어의 뜻을 알고 써야합니다. 중고등학교 문법책을 다시 공부하고 참고서와 국어교과서를 공부하세요. 책을 10년간 열심히 읽으면 발췌독도 가능합니다. 공부를 하세요. 아시겠어요?”
한국에서 굉장히 유명한 작가와의 대화에서 그는 날카로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라고해도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거나 높게 평가한건 아니었다.
내가 해보니까 문법책이고 나발이고간에 일단 글을 왜 쓰는지, 그리고 글을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가 결정되지 않으면 단 한문장도 써내려갈 수가 없다. 설령 이게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글을 쓰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일텐데, 그러면 남들이 좋아하는 글을 써야할테고 그러면 내가 원하는걸 쓸 수가 없다는게 문제다.
“남들이 좋아하면서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조합하면 되잖아요?”
글쟁이 후배는 유레카를 외치는 아르키메데스의 표정으로 말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지만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조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쓰고싶은 글이 아닌, 감염되고 오염된 글이란 뜻이니까.
글을 쓸 때에는 그 어떤 제약이 있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남들에게 보여주고, 또 많은 이들이 읽는다는걸 알게된 순간부터 암묵적인 제약이 생겨난다. 이 제약은 나 스스로 만드는 것도 있지만 독자들의 피드백에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X발’ 이나 ‘섹X'처럼 직접적인 단어를 쓰지 않고서는 표현이 되지 않는 어떤 느낌이란게 있다. 그러나 이걸 필터링없이 그대로 썼다가는 “너무 수위가 높은거 아니에요?"라는 대답만이 차갑게 남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새벽잠을 설치는 몇 가지 딜레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을 써야한다. 고통스럽다는걸 알면서도 말릴 수 없는 불나방의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