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두고 걸으면서 얻게된 것들
- 칼럼 에세이
- 2015. 2. 26.
차를 두고 걸으면서 얻게된 것들
익숙해진 운전은 습관처럼 하는 일이라 별다른 집중이 필요치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론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다. 장거리 운전을 하고나면 온 몸이 피로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차에 말썽도 있었지만 의도치않게 차를 두고 걷기 시작한지 몇 개월. 생각해보니 많은 것들을 얻었다는 생각이든다. 왕복 40분 정도되는 거리도 자주 걸어가다보니 이제는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차를 두고 걸으면서 얻게된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1. 생각
대문호를 포함한 많은 예술가들의 취미 중에 산책이 있다. 무료하게 걷는 일은 생각의 요람이요 아이디어와 상상력의 원천인 듯하다. 실제로 10분 정도 걷다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이든다. 그것은 일이나 작업,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대화내용일때도 있고 미래에 대한 목표나 사랑일 때도 있고 사소한 노랫말 일 때도 있으며 지나가다 보이는 어떤 간판일 때도 있다. 어쨌든 괜찮은 생각들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단지 걷는건 뿐인데도!
작가이자 흡연자였던 나는 글을 쓰다가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면 밖으로 나가 먼 산을 바라보면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게 일상이었다. 키보드와 모니터 앞 혹은 공책 앞이 아니라 그냥 멍하니 있을 때야말로 글의 소재가 생각나고 빠트린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강의를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도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메시지를 전달할 제대로 된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방 안이나 사무실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걷기랄까. 향간에서는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 글을 쓴다'고 하는데 걷는걸 좋아하는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야말로 글을 쓰는게 아닐까싶다.
무작정 걷는 것도 좋지만 스마트폰 메모 앱을 활용하면 스쳐지나가는 많은 생각들을 빠르게 기록할 수 있어 유용하다. 개인적으로는 아이폰의 Clear앱을 쓰는데,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기까지, 그 찰나의 순간을 빠르게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블로거나 기자, 광고 업계나 마케팅 업계처럼 아이디어가 중요한 바닥에서는 사람들이 매번 '소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나도 여기엔 동감. 하지만 걷다보면 소재는 무궁무진하더라. 책을 수십권 읽고 수 많은 신문기사를 봐도, 짧은 글 하나 못 적을 때도 많다. 하지만 걷다보면 쓰고 싶은 글들이 샘솟는다. 이 글도 며칠 전 걷다가 갑자기 생각난 아이디어 중 하나다.
2. 비용 절약
차비를 아낄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이득이 된다. 주차비용은 둘째치고 20분 정도 되는 거리를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몇 번 걸어서 가니 단박에 지갑이 두꺼워진다. 이 돈으로 술을 먹어도 좋고 맛있는 김밥이라도 사먹으면 얼마나 이득인가. 흥미롭다.
3. 건강
만성 운동부족인 현대인들. 나 역시도 일상에서 운동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특히 춥거나 더운 날엔 더더욱 그렇다.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체육관에 다닐 때도 있었지만 꾸준히하려면 높은 수준의 의지가 필요하다. 길을 걷다보면 오르막 내리막도 있고 계단도 있고 울퉁불퉁한 모양도 있다. 한 겨울에 10분 정도 걸으면 어느새 몸이 후끈후끈하고 나중엔 땀이 살짝 나는데, 이동을 위해 걸으면서 운동까지 겸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하겠다. 도시에선 공기 자체가 그렇게 좋지는 않겠지만 먼지구덩이인 실내에서 하루종일 있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지나가면서 꽃도 보고 나무도 보다보면 저절로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좋은 음악과 함께라면 신체적인 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에도 이득이 되리라.
4. 보이지 않던게 보인다
분명 나의 시선에는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많은 것들이 보인다. 새로운 치킨 집, 새로 생긴 원룸, 주차장, 사람들, 풍경, 날씨, 하늘. 음식점을 만나면 '나중에 가봐야지...'라거나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까, 나이는?' 따위의 잡생각이 자동으로 올라온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를 봐도 이름이 궁금하고 꽃말이 궁금해진다. 정말이지 길에서는 궁금한 것 투성이고 호기심 천국이다. 그것들이 질문으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론 하나를 배운 셈이되어 무언가가 내면에 쌓일때가 있다. 궁금한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모르는게 많다는걸 느끼면 느낄수록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이해하게되어 겸손해진다. 뭐, 그렇다고 수도승이 되려는건 아니지만.
잊고 살았던 것들이, 죽었던 것들이 다시 되살아나서 내 눈 앞에 펼쳐져있는 듯하다. 알게 모르게 지나가는 길이 바뀌고 있음을 깨닫는다. 기존에 있던 건물이 사라지고 삐까뻔쩍한 건물이 순식간에 들어선다. 걷다보면 세상 천지에 생동감이 있고 변화가 있음을 알게된다. 운전석에서는 느낄 수 없던 경험이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나 풍경이 있으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기도한다. 단지 스쳐지나가는 것일지라도 차에서의 속력과 걸을 때의 속력이 다르므로 훨씬 더 많이 접촉하는 기분이다.
5. 자유
차를 두고 걸으면 언제 어느때고 심리적인 여유가 생긴다. 예를들어 출퇴근 시간에 어디론가 이동하는게 전혀 불편하지 않다. 왜냐하면 막힐 일이 없으니까. 주차와 관련된 여유도 피부로 느껴진다. 술자리에서는 말 할 것도 없이 마음이 편하다. 이것은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현장에서의 소속감과 깊숙하게 참여할 수 있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교통사고라는 잠재적 위험이 대부분 없어진다는 것도 알게 모르게 자유가 된 기분을 선사한다.
작년, 마카오 여행을 도보 일정으로 계획하다보니 2박 4일내내 허리가 아플 정도로 걸어다녔던 적이 있는데 당시엔 정말 힘들고 아팠지만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그러고보니 어릴땐 참 많이도 걸어다녔다. 골목 골목으로, 때로는 길을 잃어 막다른 길로 가기도하고, 지름길을 찾겠답시고 처음보는 길로 들어섰던 설레임, 길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과 풍경들, 곤충들, 나무들, 그리고 추억들. 도보여행에서의 모험.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텐데 이제는 걷기와는 동떨어진 도시를 살고있다. 이제 그런 것들을 차로 이동하면서 볼 수 없게된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봄이나 가을이 되면 당연하다시피 차를 끌고 산으로 가서 나무보다 사람이 더 많은 관광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걷는 것 자체의 기쁨과 힐링이 있다고 한다면, 굳이 멀리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면 한번 쯤 걸어보는건 어떨까. 원래 직립보행 동물 아니던가! 단지 짐이 있거나 매우 추운 날씨에서 이동에 다소 불편할 뿐이다. 솔직히 자가용 이동이 편리한건 사실이다. 다만 약간의 불편함과 지루함을 감수하면 너무나도 바쁘게 살아가는 자신에게 여유를 선물할 수 있다. 부차적으로 얻게되는 것들은 순전히 덤!
Featured photo credit: Beverley Goodwin Pedro Ribeiro Simões Patrik Jones via flickr c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