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책을 읽는가?

나는 왜 책을 읽는가?

군대를 전역한 후 사회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친구도 없고, 할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삶이 무료하게 느껴졌다. 전역을 앞 둔 말년병장 시절에는 사회에 나가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는데 막상 나와보니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난 그저 복학생 아저씨에 누가봐도 갓 전역한 까까머리를 가진 사회부적응자였고, 입에서 나오는 단어에는 군대 냄새가 짙게 배어있었다.

조급함도 한 몫했겠지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압박감에 자격증이나 따볼까 싶어 가까운 도서관에 가보았다. 머리털나고 몇 번 가지 않은 도서관이었기에 회원증조차 없었다. 회원증부터 만들었다. 나는 10분만에 도서관 회원증을 가진 프로페셔널한 남자로 변신했다!!

도서관 회원증을 손에 쥐고 알 수 없는 오로라같은걸 느끼면서 3층 열람실 문을 열었을 때, 내 눈앞엔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꽉꽉 들어찬 열람실에는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웠고, 매우 조용하면서도 기분 좋은 소음들이 난무했다. 전쟁터 같으면서도 잘 정렬된 그 모습은 비유대상을 찾기가 어려울만큼 독보적이었다. 겨우내 빈자리를 찾아 앉은 다음 가방에서 엄청 두꺼운 자격증 교재를 꺼내 펼쳐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다시 덮었다. 이때까지만해도 나는 내 가방에 든 약 400페이지짜리 자격증 교재가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책인줄 알았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내 책 2배에 가까운 교재 여러권을 쌓아놓고 무언가를 공부하는 사람들 천지였다.

'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를 한다니!'
나는 충격과 공포를 느끼는 한편 그들의 학구열에 뜨거운 감동을 받았지만 정작 내 자격증 공부는 글렀다 싶었다.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뽑아 홀짝이면서 도서관 근처를 배회해봐도 여전히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시간도 때울겸 자료실에 들어가보았다. 그 당시의 자료실은 마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처럼 장관이었다. 나는 지구상에 책이 그렇게 많은 곳은 처음봤다. 제목으로 나를 유혹하는 책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까닭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면서 관심있는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당장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도서관 열람실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연세 많은 어르신들부터 어린이들, 내 또래의 젊은이들까지.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에너지를 받았다. 저 사람들도 저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같은 생각들을 많이했다.

나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23살 남자였다. 무엇에 도전해도 좋을 나이였고, 실패해도 괜찮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나는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남들처럼 영어공부나 할까 싶다가도 열람실에는 온통 공무원 공부하는 사람들 천지라서, 그들처럼 공무원 준비나 할까 싶기도했다. 가능성이 많다는건 그만큼 위험요소도 많다는걸 의미한다. 동시에 현재의 위치가 정립되지 않은, 말하자면 백지상태였으니 모든게 불안하고 불확실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좋을지,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조언을 구해야할지 몰랐다. 아니,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내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했다. 내 안에 나는 없었다.

'나는 책에서 나를 찾았다'라거나 '책을 읽으면 성공합니다'같은 진부한 말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나 때울 목적으로 자기계발서적 2권을 대출해서 열람실에서 읽었다. 이것이 내 독서의 시작이었다. 귀빠지고 제대로 책이란걸 읽어본 역사가 없었기에 속도는 아주 느렸다. 독서란건 참 지루하면서도 재미있었다.

"같이 도서관가서 책이나 볼래?"
"책 읽으면 돈 나오나? 당장 취업되나?"
공부도 지지리도 못하는 친구의 말이었다.

나는 책에서 정답을 찾고자했다. 하지만 책이란건 쉽게 정복 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읽으면 읽을수록 정답은 오히려 멀어졌다. 책은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나에게 정답을 찾을 수 있는 생각을 줄 뿐이었다. 시험문제가 아닌 이상 정답같은게 있을리 만무하기에 애초에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책에게 묻는다는건 '나만의 정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나에겐 마땅한 롤모델이나 멘토가 없었다. 어떤 아이디어나 궁금한 사항에 대해 물어볼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내가 처음 책을 쓰고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 내가 아는 사람들 중 저서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온라인 서점에 접속하여 '책쓰기'로 검색한 다음 1위부터 10위까지의 도서를 몽땅 주문한 후 미친듯이 읽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책으로 회귀(回歸)했다. 조언을 구할 대상이 책 뿐이었던게 사실이다. 책쓰기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에게 묻고, 책으로부터 찾고, 책과 대화했다.

독서의 위력은 수치나 명확한 사실관계로 설명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내 친구의 말마따나 책 읽는다고 당장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100권 읽어도 돈 같은건 안나온다. 1,000권 읽어도 안나온다. 오히려 돈은 소비하고 시력만 나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그동안 살면서 너무 책을 안읽었던 탓도 있지만 독서라는 행위가 주는 특유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마라톤 중독자나 극한체험을 선호하는 사람들처럼 독서도 지루함끝에서 오는 독특한 맛이 있다.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고 이해하고 알 수 있다는 사실에선 행복이 느껴진다.

나는 사람들이 가급적 책을 안읽었으면 좋겠다는 나쁜 심보도 있다. 가능하다면 이 위대한 행위를 나 혼자서만 독차지하고싶은 욕심 탓이다. 하지만 수요가 줄면 공급도 줄어들테고, 공급이 줄어들면 결국 내가 읽을 책도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출판 시장은 보다 활성화되어야한다는 생각이다.

내가 책을 읽는 두번째 이유라면 독서가 글쓰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나는 글과는 담 쌓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된 다음 '나도 글 잘쓰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는걸 알게 되었는데, 내가 글을 엄청 잘 쓰는게 아니다보니 그들에게 뭐라 조언해줄게 없는 편이다. 내 경험에 빗대어 다양한 책들을 재미있게 읽고, 하고싶은 말들을 연습삼아 글로 쓰다보면 좀 나아질거라는 이야기 밖엔.

세번째 이유는 쌓이고 쌓인 독서력이 어떤 경우에선 인생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타나는 탓이다. 독서 후 마치 자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듯한 그 기분은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깨닫는덴 백 권 이상의 독서가 필요했다. 나 역시 그전까진 독서 따위가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는건 쉽지 않다. 사람들은 방어라도하듯 독서 행위를 폄하한다.
"SF 소설은 모조리 쓰레기에요!"
"자기계발은 다 똑같아서 쳐다보지도 않죠. 논어나 맹자라면 또 모를까"
"소설요? 다 허구 주제에 무슨 도움이 되죠?"
"저는 인문학을 좋아하죠. 그래서 현실 경험을 많이 쌓을 예정입니다."
"경제경영 관련 책을 조금 읽어봤는데 제 월급은 그대로인데요?"

CEO들로 구성된 최고위급 과정에서 쉬는 시간에 그들이 책 읽는 모습을 보고 나는 박수를 쳤다. 보라카이 해변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몇 시간이고 엎드려 책 읽는 외국인들을 보고 감탄했다. 카지노로 시끌벅적한 마카오 5성급 호텔 로비에서, 학사비치에서 그들은 독서를 하고있었다. 그들에겐 그게 휴식이고 그게 휴가인 것이다.

독서는 말하자면 일종의 투자개념이다. 열매를 얻으려면 빈 땅에 씨를 뿌려야한다. 사과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지길 기다리며 누워있는 것보다 더 멍청한 짓이 있다면, 사과나무를 심지도 않고 사과가 열리길 기대하는 것이다. 책은 1년을 수 십년 인생으로 확대한 농사와도 같다. 독서는 가장 역사 깊은, 지구상에서 최고로 성공한 유행이다.

나는 재능으로 작가가 된 게 아니다.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들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다. 지금 읽고있는 책들이 앞으로의 나를 어떻게 만들지는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흥분되고 설레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