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0번째 글, 헝그리 정신
- 일기
- 2018. 5. 1.
3,700번째 글, 헝그리 정신
오늘 정말 바쁜 하루를 보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오전부터 정신없이 일하고 회의에 서류 필요한게 있어서 여기저기 방문했다가 또 와서 일하고 그러다보니 시간이 부족해서 오늘 단 한끼도 못먹었다. 위가 줄었는지 배는 그다지 고프지는 않다. 그냥 온 몸에 힘이 없을 뿐. 살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건 헝그리 정신이라기보다는 그냥 귀찮아서 반, 시간 없어서 반으로 안먹은 것 뿐이다.
바쁘게 살아도 즐겁게 일하는 중이다. 나는 내가 창의력을 발휘하고 전체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일을 하는게 적성에 맞는 것 같다. 책읽기, 글쓰기, 사진찍기, 동영상 만들기 등은 모두 이에 잘 부합한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숨이 턱턱 막히거나 정말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싶은 충동같은건 없다. 나는 프리랜서라서 원하는 시간대에 일하고 원하는 시간대에 쉴 수 있다. 여러 미팅이나 회의, 강의 등은 시간제약이 있지만 대체로는 그렇다.
말하고싶은 헝그리 정신은 말 그대로 ‘정신'에 대한 부분이다. 내가 요즘 주로 생각하는것은 '작년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아진점은 무엇일까?'같은 철학적 또는 자기반성적 물음이다.
나이를 먹어가다보니까 용기는 줄어들고 겁은 더 늘어나는 것 같다. 20대때 철없이 설치고 다니면서 열정과 패기만을 온 몸에 둘렀던 때, 아는것도 하나 없이 근거없는 자신감에 차 있던 그때가 때로는 그립다. 아는것이 하나둘씩 늘어나니 그만큼 조심스러워지고 겁이 많아진다. 그러고보면 예전에는 나름대로 이런저런 도전도 많이하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것 같아 안타깝다. 대표적인 예가 나름 작가라는 사람이 책을 못낸지 벌써 3년이 넘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지금은 책에 넣을 씨앗글 원고조차 없는 상태다. 먹고 살기 바빴다는 핑계만이 공깃속을 떠다닌다.
오늘은 꽤 더웠다. 오후에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차에 표시된걸 보니 무려 30도. 정말 여름이 모퉁이만 돌면 있을 것 같다. 그럼 올해도 벌써 반 정도가 지났다는 뜻이다. 올해 반년동안 난 도대체 무엇을 이루고 얼마만큼 발전했나?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공부해야할 것도 쌓여있다. 다소 적극적이고 욕심을 부려 공부해보고싶은 분야도 있다. 일하는 분야 책도 열심히 읽어야하고 외국어 공부도 해야하고 동영상 편집도 좀 더 능숙하게 하고싶고 뭐 그렇다. 8마일의 명대사인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가 어울리는 시점이랄까. 내가 너무 욕심부리는 것일지, 아니면 그만한 노력을 원래부터 해야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누가 좀 알려주면 좋겠다.
정신이 헝그리하다는 것은 배가 고플 때 밥을 먹어야하는 것처럼 정신을 채워넣어야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럼 이제 무엇으로 채울것인가? 어떻게 채울것인가?가 남는데, 나는 남한테 배우는걸 잘 못하는 타입이라 역시나 내 선택은 책과 독학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사파'이고 사소한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알아서 해야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함께 강한 인상을 준 작품이다. 여러번 읽었다. 나는 이 작품이야말로 헝그리 정신, 아니 정신 헝그리,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관계 헝그리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도 인간실격은 아닐까? 인간실격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마치 내 이야기인 것 같아 섬뜩하다.
지혜의 요람은 채워지질 않고 지식의 갈증은 갈수록 심해진다. 과거보다 더 많은 도서를 구입하고 독서시간을 더 늘렸지만 오히려 궁금한것들과 공부해야할 것들이 더 늘었다. 이런식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따지고 들어가면, 과거의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살았던걸까? 예전에는 실제로 더 배고팠고 더 추웠고 더 더웠는데.
지금 내가 내 눈을 현미경으로 볼 수 있다면 아마 흐리멍텅할 것만 같다. 뭐랄까… 예전보다 간절함도 없는 것 같고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돼 버린건 아닐까싶어 무섭기까지하다.
한동안 너무 바쁘게 일만했나? 달력에 적힌 4월 일정을 보니 한달동안 단 하루도 제대로 쉰 날이 없다. 떨리는 손으로 5월로 달력을 넘겼는데 지금 일정만으로도 5월도 만만치는 않을 것 같다. 사실 바쁜게 오히려 낫다. 너무 여유로우면 잡생각만 들고 하릴없이 시간만 가기 마련이다.
한 끼도 못먹어 속은 쓰리지만 글은 잘 나온 것 같다. 너무 무리하면 안좋겠지만, 가끔은 하루정도 굶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나같은 경우에는 전체적으로 차분해지고 침착해지는 효과가 있다. 헝그리 정신을 유지할 때 내게 필요한건 PC와 인터넷 뿐이다.
내가 무덤으로 가지고 갈 자서전의 첫 문장은 “부끄럼 많은 생애였지만, 꽤 괜찮은 시간이었습니다"로 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