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자의 기록] 단무지 할머니
- 칼럼 에세이
- 201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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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정 때문에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시장통에 있는 김밥집에 들렀다.
꽤 이른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장통 중간쯤에 있는 김밥집이기에 내부가 그리 크지 않아,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입구쪽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김밥 2줄과 참치김밥. 사실 나는 땡초김밥을 좋아하지만 빨리 먹고 이동해야 했기에 무난한 참치김밥을 먹기로 했다.
이곳은 시장통에 있는 김밥집이라 가격은 저렴한 편이다. 나는 학생때부터 여기를 자주 애용하고있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있다보니, 앞에 있는 문구가 보였다.
'물은 셀프'
"아, 물이나 좀 마셔야겠다."
컵에다가 잔뜩 물을 떠오는데, 내 자리에 방금 들어온듯한 어떤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아, 할머니 거기 앉으세요. 저는 여기에 앉을게요."
다른곳을 찾아봤지만 자리가 없었기에, 결국 나는 처음보는 할머니와 한 테이블에서 마주보며 김밥을 먹게 되었다.
나는 정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김밥에 얼굴을 파묻고 밥만 먹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던 그 할머니는 '물은 셀프'와 함께 단무지도 조금 담아 가져오셨다.
한참 밥을 먹었을까. 할머니가 손짓을 했다.
"이 단무지 좀 잡숴"
"아, 할머니. 저는 단무지 안먹어도 되니 할머니 많이 많이 드세요."
"내한테는 만타(많다)"
처음보는 나에게 할머니는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셀프 단무지는 원래 남기면 그만이다.
할머니는 고작 김밥 딱 1줄만 드시고 계실뿐이었다. 김밥 1줄의 가격은 900원.
할머니의 나이로 미루어보건대, 아무리 못해도 나보다 연배높은 아들이 몇명쯤은 있을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손자뻘쯤 될법하다.
단무지는 총 4개.
할머니가 다시 한번 손짓했기에 나는 예의상 단무지 하나를 집어먹었다.
먼저 할머니가 하나 드셨는가보다.
이제 남은 단무지는 2개.
"이 단무지 좀 잡숴요"
"아하. 저는 단무지 별로 안좋아해서… 할머니가 많이 드셔야지요"
"내한테는 만타. 좀 거들어줘"
그 뒤로 할머니는 다 드신 김밥을 뒤로하고 인사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접시에 단 하나 남은 단무지 1개.
마지막으로 내 입으로 슥 밀어넣으며 나도 자리를 일어섰다.
그러고보니 우리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나는 어릴적에 외할머니와 오래도록 살았기에 할머니와의 추억이 많이 있다.
예전에도 나의 외할머니는 처음보는 누군가와 금방 대화를 나누곤했다. 그 당시의 나도, 지금의 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할머니에겐 아주 익숙한 상황이었던 듯 하다.
어쩌면 여성들의 생물학적 친화력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거랑은 성격이 조금 다른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있는걸까?
그러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경계와 의심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그런 기술.
그리고 헤어질 땐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듯 갈 길을 가는 그런 초연함.
좋은걸까, 나쁜걸까.
고향집에 있는 인심 가득한 할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들.
그들은 누구와도 쉽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지 않는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절대 모순이 아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신뢰하면서도 동시에 불신할 수 있다.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서로 의심하고, 마음을 열지 않을수도 있다. 충분히!
우리내 할머니들의 내면을 살펴보면 남모르는 아픔과 고통, 피눈물이 자리하고 있을것이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나는 어릴적 외할머니가 숨어서 흐느끼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몇 번 본적이 있다. 그들도 여자고, 그들도 사람이며, 고귀한 존재다.
마치 나의 외할머니 같은 '단무지 할머니'가 떠나간 뒤,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기분은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사람이 극심할 정도로 슬프면 눈물을 흘리거나 통곡하지 않는다. 그저 멍~ 할 뿐.
'단무지 할머니'도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할머니, 또 외할머니일 것이다.
오늘은 누군가가 '단무지 할머니'에게 전화 한통이나 했으면 좋겠다고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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