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라가 말하는 450년 사랑이 이루어지는 다리
- 칼럼 에세이
- 2014. 7. 18.
미이라가 말하는 450년 사랑이 이루어지는 다리
1998년 경북 안동. 정상동이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주인 없는 무덤들을 이장하게 되었는데, 무덤에서 미이라가 튀어나왔다. 무수한 부장물들과 함께.
이 미이라와 부장물들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시신을 보관하던 관이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의 무덤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관계자가 조사에 착수하는 과정에서 한글 편지 한 통과 시(詩)가 발견되었는데, 편지 내용을 근거로 미루어볼 때 400여년 전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가로 58㎝, 세로 34㎝의 한지에 붓으로 써내려간 한글 편지였다. 이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안동대 박물관 3층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병술 유월…'로 시작하는 이 편지의 주인공은 고성이씨 이응태(1556~1586). 편지의 글쓴이는 그의 아내 원이엄마다. 당시엔 종이가 매우 귀했다. 그래서 이 편지에는 상하좌우 여백을 남기지않고 빼곡하게 글이 들어차있는데, 그만큼 전할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한다. 공백의 미를 절제하는 이런 방식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편지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나이다'로 끝났다.
고성이씨 이응태는 아내와 아이, 그리고 아내의 뱃 속에 있는 아이로 이루어진 네 가족의 가장이었다. 당시엔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었고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중이었다. 이응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당시로서도 젊은 서른 한살의 나이로 전염병을 이겨내지 못한채 가족들과 작별했다. 엄마와 원이, 그리고 뱃 속의 아이만 덩그러니 남았다.
남편을 잃은 아내는 그 슬픔을 이루 말 할 길이 없어 죽은 남편에게 부치는 편지를 썼다. 편지로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엮어 미투리라는 신발을 만들었다. 이 미투리 역시 한지에 적힌 편지로 감싸져 있었으나 세월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훼손되어 일부 내용을 제외하곤 확인이 어려운 실정이다. 미투리는 남편의 쾌유를 빌면서 삼기 시작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인데, 미투리의 주인공은 신발을 신어보지도 못한채 세상을 떴다. 그녀는 이 신발을 신고 남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남아있는 자식이 가여워 주인없는 미투리를 무덤에 넣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 숭고한 사랑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안동댐 인근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낙동강에 비치는 달 빛 등을 활용한 관광자원화 전략을 꾀하던 안동시는 지체할 이유없이 상아동과 성곡동을 연결하는 나무 다리를 계획한다. 길이 387m에 폭 3.6m의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나무 다리는 원이엄마 미투리의 형상을 띈다. 주민 공모를 통해 선정된 '월영교'라는 이름이 붙었고, 다리 가운데 있는 정자는 '월영정'이라 했다. 2003년 개통된 이 목책 인도교는 국내에서 가장 큰 목책교다. 개통 이후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목책이 부식되는 바람에 무너질 염려가 있어,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수리 과정을 거친 후 2008년 12월에 다시 개통하였다.
이후 <내셔널지오그래픽>, <앤티쿼티>, KBS TV <역사스페셜> 등에 대대적으로 실렸다. 월영교는 안동의 대표 관광코스 중에 하나가 되었다. 안동 5대 야경 중 으뜸이며, 1년에 100만명 이상이 찾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보통 유명 관광지는 지역민들에겐 홀대받는 곳이 많은데, 유독 월영교는 지역민들에게도 사랑받는 아름다우며 슬픈 곳이다.
각종 매체에선 원이엄마 스토리를 '조선판 사랑과 영혼'으로 쉽게 이야기하지만 쉽게 동의하긴 어렵다. 한국적 정서가 잘 살아있으면서도 지하에서 지낸 길고 긴 어둠의 세월이 주는 감동은 매우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영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나무다리인 월영교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리를 건너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달 빛 밝은 밤에 다리를 건넌다면 좀 더 확률을 올릴 수 있게된다.
전국 관광지를 돌다보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다리'는 엄청 많다. 하지만 450년 사랑이 이루어지는 다리는 월영교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