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자의 기록] 귀신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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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는 옛부터 선비나무 또는 학자나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유례있는 품종이다. 벼슬을 했던 집에서만 키울 수 있었으며, 평민들의 집에서는 키울 수 없었다. 현존하는 사원, 향교, 마을 등의 초입에 회화나무가 있는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회화나무가 잡귀를 쫓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회화나무 특유의 냄새와 모양새를 잡귀가 싫어하는 탓에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뻗어나가는 모양이 직선적이면서도 구불구불하고, 크게 자라며, 천년 이상을 거뜬히 살 수 있기 때문에 선비의 기개와 포부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경상북도 안동에서는 잡귀를 쫓는 회화나무에 귀신이 들었다.

시내 방면에서 안동댐으로 향하는 길목에 커다란 회화나무가 한그루 서있다. 왕복 2차선 도로 중앙선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아주 큰 나무였다. 높이, 두께 등으로 미루어보아 수령이 족히 300년 이상은 된다는게 정설이었다. 노거수. 도로가 좁은데다 나무의 크기가 상당했기 때문에 차량 통행에 큰 불편을 주었고, 야밤에 그 나무에 충돌하는 교통사고도 일어나곤 했다. 담당 시청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교통에 불편을 주는 이 나무를 왜 베어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지역에서는 '귀신 나무'로 통했다. 베어내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죽어나간다는 무서운 전설이 있었고, 안동 사람들 대부분은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원래 이 나무는 임청각 99칸짜리 집 대문 밖에 위치해 있던 것이었다.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로, 석주 가문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제는 교통편리를 제공한다는 말도 안되는 소문을 퍼트리며 임청각 아래채를 허물어 버리고 그곳에 철길을 놓으며 정기를 끊어버렸다. 도시도 아니거니와 인구가 많지도 않고, 광산물이 대량으로 있는 것도 아닌 시골 안동에 철길을 놓은 이유는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고 반란의 싹을 조기에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경북 안동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도시이기도 하다.
임청각 옆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전돌로 지어진 신세동 7층 석탑이 있다. 기념비적인 문화유사인데, 철길을 놓는 과정에서 진동, 소음, 매연 등을 고스란히 버티다가 약간 기울기도 했다. 하지만 귀신이 돌봐주었기 때문인지 회화나무는 살아남았다. 나무 몸통에 있는 도끼자국과 생채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조국 없인 내 삶도 없소이다"
"나무 신이시여. 부디 이 하찮은 목숨일랑 가져가시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임청각과 나무 밑에서 각오를 다지며 떠날 채비를 하였다. 전략을 토의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는데도 나무 그늘은 큰 도움을 주었다. 안동을 떠나 만주로 향하는 독립운동 길에서 뜨거운 피는 강물을 이루었고, 수 많은 영혼들이 하늘로 올라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절개를 다짐했고 부조리하게 죽어간 슬픈 영혼들이 나무에 깃들었다.

다시 1970년. 경북 안동.
"이 나무를 베는 자에게 50만원을 주겠소!"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귀신 나무를 베어내는 자에게 포상금을 준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의 근원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당시 50만원이면 꽤나 큰 돈이었는데, 이 나무를 베어내자니 목숨이 위태롭고 그대로 두자니 원성이 자자했다. 관리 당국에서는 원성이 심해지자 할 수 없이 인부를 동원하여 나무를 베어내자 하였고, 동원된 인부가 나무를 베어내는 과정에서 톱으로 가지를 치다가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돈이 궁하던 한 청년이 소문을 듣고 나무를 베겠다고 큰 소리치며 나섰으나 톱질 과정에서 이름모를 병으로 즉사했다. 또 다른 노인은 낫과 톱을 잔뜩 들고와서 나무 밑둥을 베어내기 시작했는데, 며칠 뒤 노인이 나타나지 않아 사람들이 수소문해본 결과 자신의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다음으로 쌀배달 장수가 나섰다. 쌀배달 장수는 묵묵하게 나무를 베어내다가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았다. 소문은 전국으로 퍼졌다. 뉴스와 방송국이 카메라를 들고와서 대대적으로 방송을 했고, 해당 나무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지역 사람들 역시 전보다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소문을 듣고 외지에서 건장한 청년이 나타났다. 외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 나무를 벤 시도를 한 것인데, 나무를 베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지가 마비되어 목숨을 거뒀고, 또 다른 사람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에 나무를 베다가 벼락을 맞았다.

신내림을 받았다던 무당이 동원되었다. 돼지머리가 올려졌고 나무 가지에는 이상한 줄이 걸려 있었으며 휘갈겨 쓴 한문 종이들이 나풀거렸다. 유명하던 무당 역시 작두를 타다가 날카로운 칼날에 발바닥이 반토막나면서 크게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 중장비까지 동원되었다. 포크레인이 들어와서 나무를 아작내기 위해 시도했으나 이상하게도 포크레인의 삽날이 날아가버렸다. 이후 몇 번의 시도가 더 있었고, 결국 나무를 베어내지 못한채로 세월이 흘러갔다. 그 누구도 나무를 베어낼 시도를 하지 않았고, 나무로 인해 발생하는 교통불편은 어느정도 적응되어갔다. 젊은이들은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든, 친구를 놀려먹기 위해서든 무서운 이야기를 할 때면 꼭 '귀신 나무'에서 얼마전에 또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말을 지어내서 떠들었다. 나무 주위에는 운전자들을 위해 주황색 표지판과 등이 세워졌다.

그러던 2008년 8월. 술취한 노인이 전기톱을 들고와 나무 밑동을 절반가량 베어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시민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그 나무는 어느덧 고장을 지켜주는 신령나무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었다. 밑동이 절반 이상 잘려 나가면서 나무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아있던 그루터기에서 2세목이 싹을 틔우는 기적이 발생했다. 300년 역사의 끈질긴 생명력과 독립운동가들의 굽히지 않는 절개를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큰 차량이 나무를 정면으로 들이박는 교통사고가 나면서 그루터기마저 뿌리채 뽑혀나갔고, 2세목의 생명도 죽음을 맞았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과 일제의 농간까지 버텨냈던 '귀신 나무'는 역사와 문화 속으로 사라졌다.

이 글은 '귀신나무'와 관련된 전설, 설화, 구담, 전해지던 소문들, 역사적 기록과 기사 자료들을 엮어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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