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기분 좋은 아픔
- 일기
- 201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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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것은 꼭 나쁜 것만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아픔이라고 느끼는 종류는 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정신적 아픔이 아니라 신체적 아픔 중에서 가장 흔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손가락 통증이 아닐까한다.
나름 키보드로 글쓰는 것과 강의하는 것으로 먹고사는 사람인 나는 사실 키보드를 치는 스타일이 매우 이상한 편이다.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 독학으로 키보드 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엔 마침 정보화 교육이 도입되던 시기라 컴퓨터 학원 열풍이 불었었다.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컴퓨터 학원에서 키보드에 검지부터 약지까지 가지런히 올리고 모니터에 나타나는 지시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쳐다보고 누르면서 제대로 된 입력방법을 익혔을 것이라 예상된다. 따지고보면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지시를 해서 작업을 수행해야 할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 컴퓨터가 지시하는 작업을 사람이 따라해야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니.
학원은 커녕 학교도 제대로 안다닌 내가 키보드 타이핑이 정석일리 만무. 독학이라기 보다도 그냥 스스로 깨우친 나름의 전략인 만큼 특정 손가락에 무리가 가는 방법으로 십수년동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그러고보니 젓가락질도 스스로 깨우쳤다. 나는 무언가를 배워서 하는 것보다 나 스스로 이해하고 방법을 찾아서 하는 걸 선호했었던 듯 싶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 내 젓가락질은 매우 이상하여, 어릴때부터 밥상에서 욕이란 욕은 다 먹었지만....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을 먹나요>라는 가사는 나에게 매우 뜻 깊은 문장이 아닐 수 없는데, 콩이나 멸치, 김 1장도 모두 가능하고 밥 먹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관계로 젓가락질을 바꿔 볼 생각은 여전히 없다.
다시 키보드 이야기로 돌아와서, 내가 사용하는 손가락은 왼손의 검지와 중지, 약지이며 오른손은 엄지, 검지, 중지, 약지다. 이 중에서도 키보드 타이핑에 거의 대부분의 수고로움을 감당하는 곳은 왼손은 검지,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인데, 장시간 키보드를 두드리다보면 이 곳에서 통증이 발생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키보드를 세게 두드린다. 평범한 윈도우용 키보드에서는 '다다다다닥' 소리가 날 정도 (MAC용 무선키보드에서는 그러한 소리는 없다). 물론 이 소리에 적응된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말이다.
요즘처럼 무언가 멍하고 이것도 관심있고 저것도 관심있는 상태에서는 딱히 무언가에 집중해서 오랜시간동안 작업하기 힘들다는 사실이 나를 또 힘들게 하곤 한다. 마치 화장실에서 마무리를 하지 않고 나온 느낌이랄까. 하루를 몽땅 날려버린 듯한, 말하자면 어디로 가는지도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채 하루를 그저 흘려보낸 듯한, 이를테면 흐르는 강물에 손을 담그고 아무것도 잡지 못한 느낌이랄까...
문득 저녁시간대에 손가락에 통증이 오면 괜시리 '아... 오늘은 열심히 글을 썼구나...!'라는 뿌듯함과 함께 아픔이 몰려오는데, 이것이야말로 <기분 좋은 아픔>이 아니겠는가?
헌데, 아픔과 함께 갑자기 몰려오는 두려움이 있어 그 정체를 살펴보니, 지금은 젊으니까 괜찮겠으나 추후 나이가 들어 뼈와 연골이 닳을 대로 닳은 상황에서도 이 아픔이 자고 일어나면 없어지는 통증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때쯤이면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손가락이 아프지 않은 super soft keyboard>가 나오지 않을까?
사진 - Adik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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